마을 앞에선 나는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검게 변해 버렸고 그 검은 것 마저 태우는 듯 매캐한 냄새를 뿜으며 조금씩 조금씩 살라갔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이미 아스러진 건물이 힘을 내지 못하고 엎어졌다.
보통 불이 붙으면 그 불을 끄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거나 또는 타고 있는 집이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을 전체가 불에 휩싸여 있고, 그나마 온전한 집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집안에 엎어져 죽어 버린 저 사람들은 도데체...
'마법으로 인한 불?!'
답이 나올 곳은 그 하나.
사람이 불을 인식하기도 전에 모조리 한번에 태워버릴 만한 것은 마법밖에 없다.
하지만, 마을을 통채로 구워 버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의 의구심은 그대로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옮겨졌고 그를 찾기 위해 더욱 속도를 냈다.

이글 거리는 열기에 눈길은 지뿌려 졌지만 먼발치 무너진 집들 사이로  두 인영이 보였다.
하나는  후드 달린 허름한 로브를 입은 아버지 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누구지?'이런 난장판에 저 두사람은 뭐 하는 거지?'
난 의구심이 더해져 갔고 어지럽게 흩어지는 불길속을 내 달렸다.

"훗... 두더쥐 처럼 숨는다고 다 해결 되는 것은 아니지"
아버지 앞의 다른 하나의 인영, 머리 깊숙히 눌러쓴  검은색 로브의 사내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 뒤의 차가운 색은 주위의 열기를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너 답군. 나 하나 잡는다고 마을 하나를 완전히 용광로로 만들다니..."
"잡아야 될 대상이 나오게 하려면 철저하게 주변을 짓밟아라. 자네가 말한 내용대로 했을 뿐이잖나?"
"미안하군. 그런것이나 가르쳐 줘서"
아버지의 입술 사이에서는 허술하고 거친 촌부 같은 억양은 모두 사라지고 검은색 로브의 사내와 같은 냉랭한 목소리가 음산히
흘러 나왔다.
"뭐 가르쳐준 대로 했을 뿐이지만 이렇게 나오니 잘배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래 요즘은 무슨일로 소일거리를 하고 있나?"
"... 급했나 보군. 너같은 놈까지 보낼 정도면"
"급하다, 급하긴 하지.에이,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피의 맹약서는 어디있나?"

'피의 맹약?'
난 갑자기 내 머릿속에 박힌 단어에 흠칫 멈추어섰다. 오래전 한 역사서에서 본 단어다.
두 무리의 거대 마법사 길드간의 전쟁 속에서 탄생한 맹약이 담긴 맹약서. 이 맹약서에는 수천명의 마법사의
피를 흡수하여 만들어진 마나의 정수라 말할 수 있는 전설속의 문서. 이 문서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를 만큼 오래된
이야기였고 어느 누구도 그 문서를 보았다는 사람없이 단지 이런 저런 이야기만 만들어내는 단순한 이야기의 소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저 마법사는 그 맹약서를 아버지에게 소재를 물었다.
난 자연스럽게 나의 아버지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후후. 아직도 찾고 있나보군. 전에는 그 문서를 다시 만든다고 설치더니 결국은 그 방법은 못찾았나?"
비릿한 냄새가 나는듯한 억양으로 나의 아버지 - 정말 나의 아버지가 맞는지 의문이 들지만 - 는 비웃듯 말했다.
"뭐 로사리오는 만든다고 설치긴 했지. 하지만 애꿎은 애들만 잔뜩 없애기만 했고 결국 맹약서 따윈 못만들어 냈지.뭐, 그건 그 친구사정이고 어쨋던 난 길드 장께서 피의 맹약서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았네. 괜시리 지저분하게 하지 말고 위치만 말하시지?"

728x90

+ Recent posts